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한국}공주 공산성_베버신부와 천주교

일기

by The 1975 2022. 3. 2. 20:40

본문

반응형

구석기 시대부터 한옥마을과 생태공원까지, 자연과 역사의 도시 '공주'

 

자가격리 끝나서 집에 만 있기가 아쉬웠다. 오미크론 감염자가 폭발하고 있어서 주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 곳인 자연이 많은 곳으로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러 던 중 예전에 공주 무령왕릉에 갔던 기억이 있어서 공주로 향했다. 공주(웅진)는 백제의 첫번째 수도로서 웅진시대의 아름다운 백제 문화를 꽃피운 중심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3개나 공주에 있다. 백제시대의 주요 문화유적인 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 마곡사다. 나는 이 중 공산성에 갔다.  예전에 무령왕릉에 갔다가 운전하면서 봤던 성벽인데, 나중에 가봐야지 했다가 5년 뒤인 지금에서야 가게 되었다. 이 밖에도 공주는 석장리 구석기 유적지 박물관과 정안천 생태공원과 금악 생태공원, 한옥마을, 고마나루, 알쓸신잡 공주편에 나왔던 사진명소 송곡저수지까지, 구석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볼거리가 만고, 자연 속에서 조용히 힐링할 수 있는 도시였다.

 

공주 공산성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공산성으로 들어 갔다. 역시나 세계유산유적지구 표시가 반겨주고 있다. 그 뒤에는 공주 전역에서 발굴된 비석들이 있었다. 주로 어진 마을 지도자를 기리는 비석들이 대부분이 었다. 

공산선 입구

 

 

산성 입구로 들어가 산성 주변을 걸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모두 도는데 한시간 정도 걸렸다. 산성 안에는 옛 궁전 터가 있었다. 

공주 가운데 흐르는 큰 금강 주변으로 공원들이 많았다. 

 

공산성과 독일에서 온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 

'나는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 (Archabbot Norbert Weber, OSB 1870-1956)'

 

산성을 돌다가 독일과 관련 된 것이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1900년도 초반에 독일에서 바이에른에서 온 노르트르 베버 신부가 공산성을 아주 좋아했었다는 내용의 팻말이었다. 헛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는 마음까지 들었다니.. ! 정말 공산성은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분위기의 곳이긴 했다. 

 

거룩한 순교자의 영웅의 발자취와 한국인이 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한국

 

제가 생각하는 한국의 조선시대는 '주변 나라들의 끊임 없는 침략 속 나라를 지키고 강대국 사이에 균형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내부의 어지러운 정치로 인해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것과 그 말기에는 '서양의 문물이 들어 오면서 일제의 지배까지 격변의 시기를 겪었던 아쉽고 불쌍한? 그런 시대' 로 기억하고 있다. 도데체 무엇이 이 신부에게 한국이 되고 싶다고 감동을 받게 했을까? 저 멀리서 온 외국인인의 시각이 궁금해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았다. 그에게 한국은 '거룩한 순교자들의 높은 정신과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한국을 두차례 방문했던 베버신부님

베버 신부는 독일 바이에른 주 베네딕트 수도회인 오틸리엔 수도원 신부원장이었다. 그는 이 수도회의 체계를 만들고 선교사업을 크게 확장시켰던 인물이다. 그가 선교원장으로 취임 후 퇴임할 때까지 한국을 포함해 독일 외 총 4개의 나라에 카톨릭 수도회를 만들었고, 선교회 소속 선교사는 99명에서 950명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의 해외 선교지 중 하나인 조선의 카톨릭 선교사업을 독려하기 위해 1911년, 한국을 여행 하던 중 공주에 오게 되었다. 공주는 충청도의 천주교 선교의 중심지였고 동시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당한 곳이었다. 바로 공주옥사와 황새바위 처형장이다. 초기 가톨릭신자들과 선교사들이 여기서 많은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의 한국 여행기에 공주의 공산성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나는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 고 적었다고 한다 (출처: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한국에 대한 여행회상록(Im Lande der Morgenstille. Reiseerinnerungen an Korea)』,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공주 여행기, 공주학아카이브)

 

독일은 산이 없다. 알프스 지역이 아니면, 정말 지루할 정도로 평지만 계속 된다. 산이라고 해서 가보면 아파트 단지 내 산책로보다도 낮은 언덕이 전부다. 그는 금강의 절벽과 주변의 굽이지는 산들의 중첩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가서도 느낀 건, 공주가 가진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건,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백제 전성기 문화의 중심의 기운이 아련하게 남아 있는 곳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일본에 대한 저항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봤던 푸른 눈의 신부. 

그는 공산성을 둘러 보면서, 한때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소가 일본인들에 의해 소풍장소로만 쓰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고, 일본인들이 조치원에서 공주까지 새로 만든 신작로를 보고는 '한국인들을 착취해서 만든 도로'라며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도 그의 책에서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신작로를 달리는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나귀를 타고 한국인들과 먼길을 돌아 공주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베버신부와 한국인들 (출처:공주학아카이브)

 

그는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인의 생활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한국의 공동체 정신, 뿌리와 어른에 대한 감사와 존경,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랑 같은 정신적 가치들을 특히 눈여겨 보았다. 특히 그는 순교지에서 한국인 신자들의 굴하지 않는 신앙의 열정을 확인하고 "선교를 하러 왔다가 오히려 선교를 받고 간다"고 표현하면서 신앙의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는 한국에서 큰 감명을 표현했다. 동시에 일본의 압제 속에서 고문당하고 고통 당하는 한국인들을 보고 “새 시대의 여명과 더불어 한국의 감옥, 특히 일본에 저항한 국사범들이 고초를 겪고 있는 지하 감옥에도 한 줄기 인도주의의 빛이 비칠 것이다." 희망이 섞인 기대와 소망을 적어 놓기도 했다. 그의 소망처럼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고 폐허에서 다른나라를 도와주는 나라서 성장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또한, 그림을 그렸던 베버 신부는 금강산에 갔다가 겸재 정선의 21점의 그림을 구입해 왔다. 수도원에서 보관 중이었다가 한국인 독일 유학생에 의해 발견되었다. 2000년에 뉴욕 크리스티 및 세계 경매 회사들의 엄청난 금액의 제안들을 뿌리치고, 새로운 수도원장이 임명되던 2005년, 오틸리엔 수도원은 한국의 형제 수도원인 성 베제딕도회 왜관수도원에 겸재선생의 화첩을 영구대여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925년 한국을 다시 방문했고, 이때는 금강산을 방문해 책으로 남겼다. 『금강산에서(In den Diamantenbergen Koreas,1927)』 이다. 이 책에서 그는 직접 금강산을 직접 그려 그림으로 남겼고,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 또한 사진으로 책속에 남겨져 있다. 일본화가와 한국화가가 그린 금강산 그림을 비교하기도 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출간이 되었다. 『수도사와 금강산』(1999, 푸른숲)

 

『금강산에서(In den Diamantenbergen Koreas)』, 1927

 

 

노르트르베버의 한국 여행기는 한국에서도 출판되었다. 

1. 카톨릭 전문 서점이 분도출판사의 50주년 기념 출판 『고요한 아침의 나라』 (절판 예정)

분도출판사 홈페이지에서 구매할 수 있다. 

2. 수도사와 금강산, 지금은 절판된 상태다. 지역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다. 

그가 찍은 영상은 35mm의 무성영화형식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졌다. 이 역시 DVD로 분도출판사에서 판매중이다. 

우연히 간 곳에서 독일에서 온 외국인의 자취를 찾을 줄이야.. 

 

 

구석기 시대의 부터 백제의 웅진시대의 유적인 공진성, 무령왕릉과 사비시대의 유적인 마곡사까지

생각보다 많은 유적들을 가지고 있는 공주.. 다른 곳들도 가보고 싶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